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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상담정신치료전문가)

조영주 개인전 ‘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_ 김경숙

2013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외상적 경험과 반복되는 스트레스는 뇌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꾸어 버린다. 사고하는 뇌는 상황을 평가하여 위험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한 인간이 출생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단순하고 작은 일들이 특별하게 기억되거나, 심지어 트라우마가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그 경험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지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주 어린 시절에 받은 개의 위협에 대한 공포는 어느 정도 자랐거나 어른이 되어서 받는 개의 위협에 대한 공포보다 그 강도가 훨씬 크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 개의 위협을 받을 당시의 상황이 뇌에 사진처럼 찍혀, 개와 상관 없는 상황이나 대상, 심지어 그 상황과 관계되는 것들에게 까지 공포를 느끼게 된다. 심하게는 개와 동시에 떠오르는 이미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관계단절을 시도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사람마다 취약성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능력발달을 지연시키고 바깥에서 오는 자극들에 과도하게 파장을 맞추어 일상의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자극들을 회피하거나 일반적인 반응에서 무뎌지게 하고, 또는 계속해서 긴장되고 놀란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반복되는 스트레스를 겪거나 트라우마를 겪는 동안 우리 뇌에서는 코르티솔(cortisol)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몸의 반응(reaction)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곧 싸우기(fight), 도망 혹은 회피하기(flight), 뇌가 얼어붙어 버리는 얼음땡 상태로 행동(action)하거나 마비(numbness)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호르몬들이 분비될 때, 사람은 기억을 잘 못하고(memory loss)집중할 수 없게 되기도 하며, 말을 잃기도(실어증) 한다. 이는 모두 생존을 위한 뇌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봄이 시작되는 3월 어느 날, 깊은 슬픔과 무기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30대의 한 여자가 찾아왔다. 몇 달 전에 실어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지냈던 행복했던 시절, 그와의 데이트, 유학생활의 기쁨 등을 얘기했다.

상담의 과정을 통해 그녀의 무의식 세계 중 한 부분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었고, 그 속에서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불안감은 어린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녀를 순응하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고, 때론 상황과 맞서는 아이로 만들기도 했다.

최초의 남성인 아버지와 그녀가 사랑한 한 남자는 그녀의 삶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클로즈업되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한 남성으로부터 버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필요 이상의 공포를 경험하게 했다. 때론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어른이 되어 맞서 싸우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순응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겪어야 했던 슬픔과 분노가 그녀의 작품 속에 배여 있다. 한 남자에게 지배되기 보다 자신이 그 남자를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성적 욕망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실어증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성은 트라우마를 경험할 때 남성과 뇌의 저장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남성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적당히 가려둘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그 기억이 뇌의 사방에 튀어 저장된다. 마치 토마토 주스를 만들기 위해 믹서기에 토마토를 넣고 갈다가 갑자기 뚜껑을 열면 토마토 파편이 사방에 튀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자신도 그 기억이 어디에 저장되어, 언제 튀어나올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여성은 방금 전 깔깔대고 웃었다 할지라도 어떤 자극에 의해 기억이 되살아나면 격하게 슬퍼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다. 여성 자신도 왜 이 상황에서 분노하거나 슬퍼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그 상황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단편적인 심리는 그녀의 작품 ‘진실된 이야기 2’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는 지금 이러한 과정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성장으로 다시 출발하고 있다. 비록 토마토 주스 파편 처럼 어떤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히겠지만 그 출발의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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