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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여성학 박사)

차별적 성별화된 사회 경계에서의 예술작업_ 유화정

2014

2014년 서울 동작구 성평등기금 지원사업 프로젝트, 우리 작은 젠더 이야기, 2014.8.27 – 31, 스페이스 매스

 

이분법적 (여성/남성) 성별 구분 사회 (gendered society) – 여성(female)에겐 여성스러움(feminine)을, 남성(male)에겐 남성스러움(masculine)을 요구하는 – 에서 그것의 해체적 행위(undoing)에 대한 권리를 주장/옹호하는 사람들을 한국에선 소위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라 부른다. 단어의 어감에서 알 수 있듯, 적지 않은 사람들(대부분 남성)은 페미니즘에 극렬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컨텍스트에서 조영주 작가의 이번 프로젝트 우리 작은 젠더 이야기는 ‘젠더에 재고찰적 작품’(revisiting gender as a theme)이라는 데 상당한 의의가 있다. 그리고 하나 고백하자면, 필자는 약 3년 전 조영주 작가를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이러한 프로젝트를 언젠가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 짤막한 소개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논문 주제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금세 다양한 범위로 번졌고, 인사치레라고 보기엔 너무도 집중하는 그의 열정적 태도와 빛나는 눈빛에, ‘여성학(젠더)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라는 막연한 느낌과 함께, 젠더 문제를 예술작업으로 풀어낸 오늘의 프로젝트를 예감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 관련하여 우리가 대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약 3개월 전, 프로젝트가 초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아이들(초중등)과 함께 젠더 이야기(discourse)를 예술활동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처음엔 걱정이 많이 됐다. 아이들의 경우, 발달 단계의 특성상 ‘여자는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 등의 비/가시적 사회규범을 가장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좇아 주류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어릴수록 젠더 수행성[1](gender performativity, Judith Butler 1990 in Gender Trouble)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아이들과 젠더 테마로 작업을 하는 것이 성인 대상보다 오히려 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작업의 계획서와 중간 결과물들을 공유하면서, 조영주 작가가 토로했던 어려움은 내가 예상했던 그것과는 다른 지점에 있었다. 진짜 문제는, 아이들이 이미 선생님(조영주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꿰뚫은 의도는 조영주 작가의 의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기존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평등 교육 프로그램들과 같은 궤도로 이번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사실, 조영주 작가가 의도한 바는 근본적으로 젠더에 ‘물음표’를 찍어보자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적은 – 기존 교육제도에서 시간 제약의 이유로 1년에 고작 한 두시간 이루어지는 성차별/평등 ‘교육’이 아닌(어느 정도의 교육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몇 주 동안의 연속 작업(글로, 몸짓으로, 연극으로 표현/재현)을 통해 성별화된 사회 (gendered society)에서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고, 그 결과물을 참여 학생을 비롯한, 그들의 가족,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예술가 및 일반 성인 관객들이 봄으로써 함께 젠더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프로젝트가 갖는 여러 의의들 중에서도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동의하는 지점이다.

조영주 작가가 오산 어린이들과 함께한 예쁜, 까칠까칠한, 국사봉 중학교 아이들과 함께 작업한 청순한 그녀, 멋진 그 그리고 상도동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한 리틀 드라마 프로젝트 영상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문제적 이슈들(problematic issues)이 다뤄지는데, 큰 갈래로 쪼개어보면 세 가지 개념에서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강제적 이성애[2](compulsory heterosexuality, Adrienne Rich 1980 in Compulsory Heterosexuality and Lesbian Existence). 프로젝트 영상을 보면, ‘미래의 나의 파트너 (배우자)’에 관한 상황이 나오는데, 학생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여자는 남자 파트너를, 남자는 여자 파트너를 배우자로 상정한다. 커밍아웃한 게이(홍석천)와 트랜스젠더(하리수) 연예인이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만화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넓게는 바이섹슈얼, 인터섹슈얼, 크로스젠더 등)를 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학생도 재미로라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점은 우리 사회, 작게는 학교 사회에서 이분법적 젠더 구별, 나아가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러한 이성애 규범성을 ‘정상적’이라 여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비이성애는 비정상으로 들리거나, 최소한 ‘뭔가 이상하게’ 인식된다. 그런 강제적 이성애 세계에서 30년을 살고, 영국으로 젠더스터디를 공부하러 온 나 역시도 그 틀에 갇혀 있었다. 5년 전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학교 친구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동성 여자친구(same-sex girlfriend)를 소개하는 것에 처음엔 내 마음이 다 덜컹했다. ‘저렇게 커밍아웃을 아무렇지 않게 하나? 저래도 별 문제나 불이익이 없나?’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바이트하던 레스토랑이나 번역회사에서도,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 ‘너무나 쉽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동성 여자/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1960 – 70년대부터 게이 무브먼트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3], 동성결합 파트너쉽(same-sex civil partnership 2004) 제정과 동성 결혼(same-sex marriage 2014)이 합법화된 영국이 내심 부러웠다. 제도적 관계의 찬반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초등학교 레벨부터 성교육의 일환으로 이성애와 더불어 LGBT[4] 섹슈얼리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심지어 아이들 TV프로그램(cbbc[5])에서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은, 강제적 이성애 국가에서 30년 살다 온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둘째, 성별 위계(gender hierarchy, Stevi Jackson 2005 in Sexuality, Heterosexuality and Gender Hierarchy).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논제는 한국 가부장제 사회에서 비/가시적으로 동의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이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프로젝트 영상에서 학생들은 ‘여자’의 관련어로 공부 못하는 배우, 악녀, 갑부딸, 불여시, 엄마, 며느리, 시어머니 등을 적고, ‘남자’의 관련어로는 모범생, 경찰, 선생님, 의사, 대통령, 대기업 회장 등을 적었고, 이는 드라마 따라하기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젠더 퍼포먼스(gender performance)를 통한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성을 그 자체로 열등하고 악하다고 보거나 남성의 주변인으로 한정한 것에 반해, 남성의 역할은 소위 ‘그럴싸한’ 직업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외에도 이번 프로젝트의 꽤 많은 곳에서 여성을 열등하게, 상대적으로 남성을 우월하게 묘사한 부분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렇게 드러난 젠더 위계 문제를 발견하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었고, 역할극을 통해 아이들이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것은 비디오 아트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단순히 테마로서의 젠더(gender as a theme) 보여주기를 넘어, 젠더가 어떻게 다뤄지고,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는지까지의 영역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강조와 편집을 통한 작가의 시선 또한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조영주 작가가 프랑스, 독일 등에서 활동하며 인종과 언어의 소수자로서 접한 다양한 차별문제에 대한 포커스가(한국으로 베이스를 옮기면서 더 이상 그것들은 그의 ‘문제’가 아닌 게 되었고) 한국에서 뜻밖에 만난 ‘문제적 젠더’(problematic gender)로 옮겨 온 그의 시선을 의미한다.

셋째로, 젠더 해체(undoing gender, Judith Butler 2004 in Undoing Gender)를 언급하고 싶다. 상견례 자리, 맞벌이 부부의 대화, 직장에서의 상황, 소품을 이용해 가족의 모습 설명하기 등에서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성별과 관련 있게/없게 역할극을 하며 스스로 생각하며 협상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내가 왜 다 해야 돼, 나 안 해!’ 혹은 ‘너가 여자/남자 잖아!’로 대개 끝나는 어른들의 모습에 비하면, 학생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드러나는 고민은 새롭기까지 하다. 학생들이 여자/남자로서 요구받는 역할을 인지하고,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음표를 찍어보고,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여성의 일을 남성이, 남성의 일을 여성이 할 수 있는 언두잉(undoing) 행위. 또, 그것을 관찰하는 (성인)뷰어(viewer)의 재고찰과 그것을 통해 차별적으로 성별화된 규범(gendered norm)에 대해 무비판/무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우리 모두가 젠더에 물음표를 찍게 되는 것은 조영주 작가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의도했던 지점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세계가 보는 한국은 성평등 지수에서 136개국 중 111위로 최하위에 속해 있다.[6] 반면, 국내에서 보는 성평등 관점은 ‘여성상위시대’, ‘남성역차별시대’ 등의 프레임으로 오히려 정반대에 위치한다. 한국 여성의 인권이 과거에 비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굳이 100년 전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최근 10년 사이의 법, 사회, 문화적 영역에서의 여권신장은 가시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터에서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70% 가 채 안되고, 공/사기업의 고위직 임원급 여성의 수는 5% 미만이다. 가정폭력, 강간, 묻지마 살해 등의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이며, 맞벌이 부부임에도 출퇴근 전후 집안 일과 육아(second shift, Arlie Russell Hochschild 1989 in The Second Shift)의 일차적 책임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다. 여성의 몸(body)은 여전히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소비되며, 그로 인한 성적 비하도 여성이 감내해야 한다. 과거 남성만이 독점했던 권위들이, 격동의 한국 근대화(압축적 근대성, 장경섭 1998; 2009), 여성들의 노동참여, 페미니즘 유입 등으로 무너지고 있지만, 그것(성평등 관점에서 권력의 민주화)이 비판받고 있는 현 한국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영주 작가가 던지는 메세지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아이들에게 체화된 젠더드 마인드 (gendered mind set)를 퍼포먼스를 통해 젠더 수행성을 드러내보이고, 예술가 조영주의 시선과 함께 관객에게 전달된 그것은 큰 울림을 준다. 프로젝트의 기획단계부터 결과물을 맺기까지의 과정에 간헐적으로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예술작업을 통한 젠더 구분과 위계를 극복/해체하려는 움직임은 너무나 반갑다. 그리고 이러한 ‘장’을 마련해준 조영주 작가에게도 많이 고맙다. 몇 주 연속작업을 하면서 시간제약이 아쉽다는 그와 학생들의 말처럼, 더 지속적인 장기 프로젝트도 희망해보며 글을 마친다.

글, 화정(여성학 박사과정, University of York, UK) : 섹슈얼리티, 친밀성, 가족과 관계, 퀴어이론 등에 학문적 관심을 갖고, 현재는 한국의 이성애/동성애 동거커플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1] 페미니스트 철학자 쥬디스 버틀러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젠더라는 것은 사실상 반복적 수행을 통한 사회적으로 구성된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드랙 (drag) 퍼포먼스를 한 예로 들며 설명한다.
[2] 아드리안 리치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섹슈얼리티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사회에 의해 강제받는 것을 문제시하며, 그로 인해 이성애를 규범화하고, 동시에 비이성애 (non-heterosexuality)를 비정상화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3] 사실, 풀뿌리 레벨의 저항 및 운동의 역사는 19세기,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총칭하는 말.
[5] 영국 공영방송 BBC의 어린이 채널 (children’s bbc)
[6] 세계경제포럼 WEF 2013 세계 성 격차 보고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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