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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라(더 스트림 대표)

결국, 결핍이 존재의 증명이다_ 정세라

2017

 

“봄이 시작되는 3월 어느 날, 깊은 슬픔과 무기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30대의 한 여자가 찾아왔다. 몇 달 전 실어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지냈던 행복했던 시절, 그와의 데이트, 유학생활의 기쁨 등을 얘기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한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필요 이상의 공포를 경험하게 했다. 때론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어른이 되어 맞서 싸우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순응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겪어야 했던 슬픔과 분노가 그녀의 작품 속에 배여 있다.” — 김경숙(상담정신치료전문가), 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 2013년 개인전 서문에서 발췌

작가 조영주는 한 때 실어증으로 말을 잃었다. 본래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언어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는, 말하자면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 맺기를 하는 세계이다. 실어의 경험은 이러한 세계 내에서 보편적 질서의 거부나 도피의 형태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부정하고 싶은 심리의 상태가 언어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의 근원과 상태로 부터 조영주의 작품 세계를 쫓다보면 그 시작을 그녀의 초기 유학시절에 생성된 근거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행위로부터 또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고 했듯이 그녀는 예술 작품의 근원이고 예술 작품은 그녀의 근원이다.

유학생활에서 그녀는 늘 이방인이었고, 동양에서 온 소수자였다. 여성과 이방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예술을 통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스스로에 대해 더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보이는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타자화된 시선은 초기 그녀의 작품들에도 고스란히 스며있다. 타인에 의해 혹은 스스로가 이방인으로 규정한 자신의 일상에서 순간의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기록한 1년간의 사진 시리즈 작업 I’m not acceptable, 2006-2007과 불특정 남성들의 티셔츠를 빌린 후 그 옷을 입고 하룻밤을 보낸 후 기록하는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 2006-2007가 그렇다.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 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들과 다시 재회를 유도하는 등의 의도 되어진 실행은 아시아 여성으로서 서양 사회에서 갖게 되는 선입견을 전복하려한 시도이다.

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일종의 발언의 도구로 이용한다. 작가의 이러한 시선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련의 작업으로 이양된다. 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 Universal Collaborators, Seoul, 2014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유럽 백인 남성 퍼포머를 고용한 후 함께 전시 오프닝에 방문한다. 한국 여성 작가가 백인 남성과 관계를 가질 때 따라다니는 가십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노출하고 이를 유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작용들에 대해 되돌아보는 인터뷰를 비디오에 담는다. 스스로의 여성성을 규명하고자 하기 보다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정된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 타자화된 여성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점이다. 전근대적 시각에서 보면 아시아와 여성은 비가시적 타자로 범주화되며 이는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매혹과 위협의 전복성을 내포하고 있는 판타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연구자로서 처음 마주한 조영주의 비디오 작업은 꽃가라 로맨스 Floral Patterned Romance, 2014을 비롯하여 그랜드 큐티 Grand Cuties, 2015, 디바들의 외출 The Divas go out, 2015, 워터리  마담 Watery Madams, 2015, DMG_비무장 여신들 DMG_Demilitarized Goddesses, 2015 등 다섯 편의 비디오 댄스 시리즈와 드레스를 입은 대화 Talking in a dress, 2015이다. 중년 여성들을 모델로 기용하여 제작한 비디오 댄스 작업과 리서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일련의 시리즈는 우리 어머니 세대 혹은 여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작가는 약 1년여 동안 5,60대의 아주머니들 70여명을 만나고, 그녀들을 작품의 모델이자 배우, 퍼포머로 기용했다. 작업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중년의 퍼포머들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이자 소위 아줌마라 불리우는 집단군이며 한 때 그리고 현재의 그녀로 통칭되는 여성들이다.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녀들의 동작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어색해 보인다. 이를 관찰하는 우리의 시선이 다소 불편한 이유는 그녀들이 이제는 꽃다운 아가씨가 아니라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여성들이며 그래서 주인공으로 주목받기 보다는 그저 아줌마로 대변되는 주변인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익숙한 그녀들에게 작가는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꽃무늬 원피스를, 때론 시크한 의상을 입히고 또 어떤 때는 소녀 같은 스커트에 앞치마를 두르게 한 후 화려한 모자를 씌우기도 한다. 마치 어릴 적 인형에게 옷을 갈아입히며 역할 놀이를 하듯이 그녀들을 꾸미고 아름답거나 귀엽게 연출한다.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아줌마라는 대명사 뒤에 숨은 그녀들에게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화장과 헤어 메이크업을 통한 ‘꾸미기 과정’이다.

조영주는 ‘아줌마’로 통칭되는 중년 여성들을 다른 모습으로 혹은 다른 자아로서의 혹은 새로운  ‘되기(becoming)’를 시도하고, 안내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행동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그녀들을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그들이 갖춘 현실과 다른 어떤 판타지로서 표면화한다. 사실 다른 무엇이 ‘되기’는 존재론적 지평 위에 윤리학적 사유로 깃든다. ‘되기’는 어떤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예로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이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그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일찍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되기는 소수자다(all becoming are minoritarian)”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남성, 규범, 다수성을 주체 개념으로 보는 경직된 사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여성되기’, ‘타자되기’ 등의 ‘되기’ 를 제안하였다.

작가의 모델들이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순간, 그들의 개인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그녀들은 웃는 얼굴로 새로운 캐릭터를 즐긴다. 분명 사회적 차원과 관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퍼포먼스에서의 현실 사회는 소거되고 예술 내부로 닫힌다. 마치 극장의 연극처럼 무대화되면서 말이다. 중년의 여성들은 일상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서야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서 ‘되기’를 통해 여느 아줌마들과의 동일성에서 벗어난 차이를 통한 ‘되기’를 즐긴다. 오래전 입었을 웨딩드레스와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은 아름답고 귀엽다. 몸매는 바꼈을 지언정 잠시나마 그들에게 주어진 그 상황을 만끽한다.

그녀들은 스스로가 묶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어떤 결핍에 대한 대리 보충의 과정을 퍼포먼스를 통해 극복하고 있으며 자기 존재 증명의 여정을 찾아가고 있다. 즉 주변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존재되기를 함으로써 다수 지배자의 시선이나 관점에 안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유동적이고 창의적인 사유 및 행위를 할 수 있는 힘을 ‘되기’를 통해 얻는 것이다. 그녀들은 프로젝트가 끝난 후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눈물은 몰개성적 용어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잠시나마 새로운 ‘되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나’에 대한 감정이리라.

아줌마로서의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은 비디오 매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끊임없는 작가의 ‘되기’는 일견 비디오의 매체적 특성을 고려해볼때 매우 타당해 보인다. 무빙이미지라는 형식적 특징은 이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한다. 왜냐하면 되기의 실천은 자기 증명의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상태(be)’에서 ‘존재(being)’가 되어야하는 매우 동적인 자기반영적 과정을 비디오카메라는 매우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될 수 없는 순간적인 상황으로 경험되는 그녀들의 모습은 동네 이곳저곳, 컨테이너 공장 한편, 비무장 지대 같은 장소들을 무대로 상호 텍스트적으로 구성된다. 카메라는 일견 하찮게 보이는 공간들을 통과하는(through) 과정에서 재발견하고 현재화한다. 우리가 마주한 그녀들의 여정(moving) 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유는 아름다운 인연 A beautiful match made in heaven, 2013에서 더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결혼정보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등록하고, 맞선 상대를 소개 받는 일련의 과정을 녹음하고 기록하였다.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만든 현실의 상황을 타자에게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되기’를 시도하고, 그 인물을 이혼 경력이 있는 한국의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상정한다. 결혼 정보회사에서 위치지우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며, 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판타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의도는 컨설턴트의 되돌아오는 질문에서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부조리함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키와 몸무게, 직업, 연간 수입에 대한 것일 뿐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제도일 뿐 사랑의 결실이 아님을 비꼰다.

작가가 끊임없이 판타지를 이용한 ‘되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존재가 존재자로서 정의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자 성찰의 여정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의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꾼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은 세계 내의 존재로서 타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다. 조영주가 천착하는 아줌마, 동양 여성, 이방인, 소수자 등의 공통점은 단어의 의미 자체가 결핍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상실과 결핍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수반하며 그에 대한 정의는 존재들로부터의 차이에 기인한다. 여성, 이방인, 소수자는 상대적 결핍(차이)의 존재이지만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즉 스스로가 누군가의 어머니자 아버지이고, 여성이자 남성이며, 다수자인 동시에 소수자라는 사실을 긴 여정 속 끊임없는 ‘되기’ 과정을 통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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